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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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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무버와 패스트 팔로워] 김기찬 칼럼

Contents		[김기천 칼럼] '퍼스트 무버'와 '패스트 팔로워' 논설주간 . 입력 : 2016.03.08 04:00 [김기천 칼럼] '퍼스트 무버'와 '패스트 팔로워' 미국 서부 개척 시대 초기엔 남보다 앞서 가서 깃발만 꽂으면 토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오클라호마주(州)에선 일정하게 구획된 토지를 먼저 차지하기 위한 경주가 벌어지기도 했다. 나중에 이 땅에서 석유가 나온 덕분에 일부 후손들은 재벌이 됐다. 그래서인지 미국인들은 일찍부터 ‘선발 주자의 이점(first mover advantage)’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 경제가 농업 중심에서 제조업과 서비스업 중심으로 바뀐 뒤에도 그 믿음은 변하지 않았다. 시장에 가장 먼저 진입한 기업이 경쟁자보다 훨씬 큰 혜택을 누린다는 것을 당연한 상식으로 여겼다. 그러나 서부 개척자들은 인디언의 공격 등으로 목숨을 잃을 위험을 각오해야 했다. 좋은 땅을 차지하고 성공한 사람보다 등에 화살 맞고 쓰러진 사람이 더 많았다. 기업의 경우에도 선발 주자가 후발 주자에 비해 반드시 유리하다고 말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서던 캘리포니아대 교수였던 피터 골더와 제라드 텔리스는 개척자(pioneer)보다 정착자(settler)가 성공할 확율이 더 높다고 주장하는 선구적인 논문을 20여년 전에 내놨다. 여기서 개척자는 특정 상품을 가장 먼저 개발하거나 판매한 회사, 정착자는 개척자들이 시장을 조성한 이후에 진입한 기업을 가리킨다. 이들은 치약, 안전 면도기, 추잉 껌 등 50개 제품 카테고리의 500개 브랜드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분석 결과는 일반적인 통념과 크게 달랐다. 개척자의 실패율이 47%로 정착자의 실패율 8%보다 5배 이상 높았다. 살아남은 개척자들의 시장 점유율 중간치는 10%로 정착자의 28%보다 낮았다. 개척자들은 대체로 선두 자리를 5~10년 정도 지키다 후발 주자에 밀려났다. 펜실베니아대 경영대학원(와튼스쿨)의 애덤 그랜트 교수는 최근 저서 ‘오리지널스’에서 이 연구 결과를 인용하며 “개척자들은 온갖 시행착오를 직접 겪어야 하지만 정착자들은 개척자의 실수를 보고 배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선발 주자의 이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못지 않게 불리한 점(disadvantage)도 크다. 그래서 “선발 주자보다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가 더 낫다”는 말도 나온다. 실제 GM과 포드, 구글과 야후, 페이스북과 마이스페이스, MS워드와 워드퍼펙트 등 후발 주자가 선발 주자를 제치고 성공한 기업과 제품 사례를 들자면 끝이 없다. 그런데 요즘 한국에선 정반대 주장이 대세다. 한국 경제와 기업들의 빠른 추격자 전략이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성장의 수렁에서 헤어나려면 패스트 팔로워에서 퍼스트 무버로 한 단계 올라서야 한다고 말한다. 대통령과 장관, 재벌 총수와 전문 경영인, 경제 전문가와 언론 등 모두가 한 목소리로 개척자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선발 주자로 나서는 게 위험하다고 해서 모두가 남의 뒤만 따르려고 하면 독창적인 기술과 제품이 나올 수 없다. 누군가는 먼저 나서서 개척자가 돼야 한다. 대부분 실패하겠지만 ‘선발 주자의 이점’에 대한 믿음이 유지될 수 있을 정도의 큰 성공 사례도 나와야 한다. 대박을 꿈꾸는 개척자의 행렬이 끊이지 않아야 국가 경제가 혁신성과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퍼스트 무버와 패스트 팔로워의 배턴 터치가 원활하게 이뤄져야 한다. 금융위기 이전은 물론 그 이후에도 변함 없이 세계 경제를 이끌어가고 있는 미국 경제의 힘이 여기서 나온다. 그런 측면에서 요즘 국내에서 거론되는 퍼스트 무버 주장은 한쪽으로 너무 치우쳐 있는 느낌이다. 개척자와 모험가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선발 주자가 감당해야 할 위험 부담에 대한 인식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다. 더욱이 시장 선도자가 돼야 한다는 주장은 흘러 넘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법과 제도, 관행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시스템은 개척자를 배격하고 있다. 신기술과 신제품은 법에 규정돼 있는 범위 내에서만 허용된다. 공공조달을 비롯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실적과 선례(先例)가 없는 상품과 서비스는 사절이다. 개척자가 발 붙이고 설 자리가 없다. 이근 서울대 교수는 “한국 같은 규제 환경에서 퍼스트 무버가 되겠다고 나서면 퍼스트 루저(loser·패배자)가 되기 십상”이라고 했다. 핵심을 찌르는 말이다. 이런 현실이 바뀌지 않는 한 혁신과 창조경제의 구호, 퍼스트 무버 전략은 공허해 질 수밖에 없다. 퍼스트 무버를 키워내려면 먼저 개척자가 숨 쉬고 살 수 있는 환경부터 조성해야 한다. 동시에 패스트 팔로워를 ‘모방꾼’으로 폄하하는 잘못된 인식도 바로 잡아야 한다. 시장 선도자와 빠른 추격자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균형점을 찾아내는 게 한국 경제의 당면 과제다.